에르빈 롬멜은 히틀러가 독일의 대빵이던 시절에 독일의 장군이었습니다.
롬멜은 당시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던 독일의 전쟁영웅이다.
하지만 롬멜은 히틀러의 추종자는 아니었다.
그리고나서 아프리카전선으로 이동해서 활동을 하면서 사막의 여우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다.
과감한 전술과 전차부대의 기동성을 이용한 작전은 연합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군뿐아니라 연합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전술과 과감성으로 그는 군인들사이에서 신화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롬멜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히틀러에게 더많은 전차와 무기, 보급품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히틀러는 롬멜의 요구를 무시하며 그는 지금까지도 잘했고 앞으로도 최소한의 병력과 장비로 충분히 잘해낼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롬멜의 전략도 충분한 보급이 없는상태에서는 앞으로 나가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에 다다랐을때 아프리카 군단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당시 70대의 전차만 가지고 있었고 지원군도 기대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1942년 초 롬멜의 기갑군단은 엘브레가 요세에서 54대의 전차와 물자 보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걸로는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낼만한 전력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롬멜은 과감하게도 선제공격을 실시했다. 그가 아내 루시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아마 그들은 나를 미친놈 취급할 거요. 그러나 난 절대 미치지 않았소. 그들보다 더 넓게 보고 있을 뿐이지.' 롬멜의 군단은 전진했고 선제공격을 하여 놀랍게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군 대장, 그리고 육군 수장을 역임했다.
이후 1943년 말에 롬멜은 독일에서 이루어지는 집단 수용소와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해 6월 해군 사령관 루게는 롬멜의 말을 일기에 기록해 놧다.
" 국가의 기본은 정의여야한다. 하지만 우리의 지도부는 깨긋하지 못하며 학살행의는 커다란 범죄이다." 슈투트가르트 시장 칼 슈트뢸린의 기록을 보면 "제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으며, 히틀러에게 급히 전쟁을 종료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겠다고도 했다."
1944년 7월 9일 케사르 본 호프아커라는 사람이 롬멜을 찾아와서 히틀러 암살계획에 관한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계획과 베를린 그룹의 움직임, 그리고 암살이 성공하면 전쟁이 끝나고 독일군이 철수 한다는점을 말했고 특히 롬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고 롬멜은 이에 동의 했다고 한다.
호프아커는 7월 11일 클라우스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를 만나 7월 20일에 슈타우펜베르크가 총통 사령부 회의실에서 히틀러 폭사를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히틀러는 롬멜에게 자살 또는 특별재판을 명령했고 롬멜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는 쪽을 선택했다.
자살을 할시 장례식은 예우를 갖추어 주고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이었다.
에르빈 롬멜은 자살을 선택했고 집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숲속의 자동차안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을 했다.
출처-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85